지난 글에서 우리는 우울증의 뿌리가 상실감에서 비롯된 슬픔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인 이민자로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지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요나서 4장과 연결하여 우울증의 영적 차원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요나, 우울과 분노 사이에서
요나서 4장은 놀라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받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셨을 때, 선지자 요나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3
수천 명의 생명이 구원받은 그날, 요나는 깊은 우울감 속에서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앗수르는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는 강한 기대가 있었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상실감과 우울, 그리고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어찌 보면 요나의 모습은 우리 이민자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내가 옳다고 믿었던 세계가 흔들릴 때, 그 무너짐 앞에서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의 모습 말입니다. 우울증과 함께 분노가 올라오는 것, 이것은 요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에게 폭풍처럼 몰아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박넝쿨을 준비하시어 뙤약볕 아래 지쳐 있는 요나에게 그늘을 주셨습니다. 그의 육체적 고통을 먼저 돌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4
이 질문은 정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감정 뒤에 있는 마음의 방향을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상담가이신 하나님께서 우울과 분노 속에 있는 요나에게 원하셨던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성도들에게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더 기도하면 낫는다”는 말은 종종 상처가 됩니다. 특히 이민의 현실 속에서 이미 충분히 지쳐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우울증을 순전히 의학적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도 마음의 영적 차원을 놓치게 합니다.
성경적 관점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울증은 실재하는 고통이며, 그 고통은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고통 안에서 우리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길입니다. 박넝쿨로 먼저 그늘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처럼, 교회 공동체도 우울한 이웃의 아픔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요나에게 박넝쿨을 주셨던 하나님은 오늘 이 땅에서 지쳐 있는 우리에게도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을 향한 따뜻한 초대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저널(https://www.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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